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의 여진 정벌 (문단 편집) === 여진의 맹공, 척준경의 활약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윤관의_여진정벌.jpg|width=100%]]}}} || || {{{#000000 《여진 정벌 기록화》 (안재후 作. 1975년) }}} || 고려군이 9성을 개척하자 삶의 터전을 통째로 상실하게된 여진족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완안부의 추장 오아속(烏雅束)은 사냥 도중에 17만 고려군이 자신의 동포들을 몰아내고(병사들이 곧 백성이던 유목민이었기에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안하면 [[베트남전]]의 [[미군]]처럼 [[게릴라]] 항쟁 체험이 가능하다.] 9개의 성을 축성한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급히 지도자들을 소집해 대처를 논의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힘으로 짖누르던 강경한 국가인 요나라로 성장한 거란군을 격파했던 고려인데다 이번에 정벌로 동원된 17만 명 병력의 수준은 전부 최정예였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도 승승장구하던 완안부 여진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던 상황이었고 [[요나라]]가 고려 편에 서서 자신들의 뒷통수를 갈긴다면 망할 수가 있어서 그 때문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때 오아속의 동생 [[태조(금)|아구타]]가 "겁에 질려 있다면 다른 부족들도 우리를 겁쟁이 취급 할테고 그렇다면 우리 부족의 생존은 장담하지 못한다. 차라리 맞서 싸우는 편이 낫다!"라고 주장했고 별다른 수가 없었던 완안부 여진은 갈라전 탈환을 목표로 삼게 된다. 이때 고려군은 큰 오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고려군은 점령전 계획을 세울때 갈라전 일대 지리를 숙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해당 지역이 병목 지역이란 첩보를 가지고 9성을 쌓아 순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실제론 우회로가 너무 많아 9성이 동시다발적으로 공략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전방과 후방을 구분해 세워 놓은 기지들이 전부 전방이 되어버린 상황이었기에 1년간 버틴 게 용할 정도였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근거지를 잃게 된 여진은 보복을 다짐하는 한편,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온갖 속임수를 쓰고 갖은 무기를 동원해 공격해 왔는데, 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자주 복병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윤관 열전}}} ---- >이전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여진의 궁한리(길주로 추정) 밖은 산이 잇달아 벽처럼 서 있는데 오직 작은 길 하나가 겨우 통하므로 관성을 설치하여 그 길을 막는다면 여진에 대한 근심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빼앗은 뒤 보니 수륙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듣던 바와 매우 달랐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 7, 예종 3년 5월}}} 점령 이후의 역사는 고려와 여진의 끊임없는 전투로 점철된다.[* 1108년 기록된 고려 - 여진 간의 전투는 총 19번이 벌어졌다. (출처: 최창국. 공험진(公嶮鎭)과 통태진(通泰鎭) - 고려와 여진의 후기 전투를 중심으로 -)] ||<-4> 동북 9성 점령 이후 전투 목록 || || 년도 || 일자 || 전투가 벌어진 장소 || 내용 || ||<|9> 1108년 || 1월 || 가한목 병천 전투 ||고려군 8천이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패전. 이후 영주성을 여진군이 포위 했으나 전투 여부는 분명치 않음 || || 1월 || 공험진과 영주성 사이 ||고려군이 영주성으로 이동 중 여진의 기습을 받았으나 패퇴 시킴 || || 2월 || 웅주성 전투 ||여진족 수만이 웅주성을 포위하며 함락 위기를 맞으나 구원군이 도착하며 격퇴 || || 2월 || 길주 전투 ||정주성을 출발한 웅주성의 구원군이 길주에서 여진을 격퇴 || || 3월 || 영주성 전투 ||여진의 대군이 영주성을 포위했으나 격퇴함 || || 4월 ~ 5월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9&cp_code=cp0208&index_id=cp02081333&content_id=cp020813330001&print=Y|웅주성 전투]] ||여진족 수만이 웅주성을 포위하며 함락 위기를 맞으나 구원군의 도착으로 격퇴 || || 5월 || 오음지 전투, 사오 전투 ||웅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개경의 중앙군이 웅주로 향하던 중 오음지와 사오에서 승리 || || 8월 || 함주 전투, 영주 전투 ||[[왕자지]]와 [[척준경]]이 여진족을 격퇴 || || 8월 || 길주 전투 ||여진과의 교전에서 유익, 송충, 박회절 등 지휘부가 전사 || ||<|7> 1109년 || 1월 || 함주 전투 ||여진의 기습에 왕사근, 하경택이 전사 || || 3월 || 숭녕진 전투 ||장문위가 이끄는 수군이 숭녕진에 도착해 여진군 38명의 목을 벰 || || 3월 || 길주 전투 ||[[허재(고려)|허재]], [[김의원(고려)|김의원]]이 길주성 밖에서 여진군 30명의 목을 벰 || || 5월 || 선덕진 전투 ||여진이 선덕진을 공격해 물자를 침탈하고 퇴각 || || 5월 ~ 7월 || [[길주성 전투]] ||여진군 6만이 성을 포위, 130일 간의 격전 끝에 물리침 || || 5월 || [[공험진 전투]] / [[갈라수 전투]] ||오연총이 이끄는 개경 중앙군이 길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올라갔으나 공험진과 갈라수에서 대패 || || 5월 || 타길성 전투 ||[[사묘아리]]가 이끄는 여진군이 갈라수 전투 이후 타길성을 공격해 점령 || * 1108년 1월에는 [[윤관]]이 오연총과 함께 정예 병력 8천을 이끌고 여진족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가한촌(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지나가던 중 매복한 여진의 공격에 지휘부까지 궤멸되어 윤관 주위에 단 10여 명만이 남아 전멸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척준경이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해 10여 명의 목을 베었고 최홍정, 이관진이 병력을 수습해 여진을 겨우 격퇴한 사건도 있었다. 또한 같은 달, 여진의 알새가 이끄는 보기 2만 명이 영주성 앞에 진을 치고 무력 시위를 했다. [[윤관]]을 비롯한 지휘부가 수성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나 [[척준경]]이 "나가 싸워야 이길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해 병력을 이끌고 성문을 나서 여진족 수십명의 수급늘 베고 19개 부락을 점령하기도 했다. 윤관은 전 병력의 집중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영주성으로 전 병력을 집결 시켰는데 이때 공험진에서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던 권지승선 [[왕자지]]가 도중에 여진군과 만나 대패하고 왕자지는 말까지 잃어버려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척준경]]이 급파해 왕자지를 구해주고 적진으로 들어가 철갑 기병이 타고 다니는 말 한필을 빼앗아 왕자지에게 주기도 했다. 같은 해 2월 11일에는 여진의 알새가 이끄는 병력 수만이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포위했고, 최홍정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기습 공격을 감행해 한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세는 서서히 불리해져가 성이 점령되기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최홍정은 [[척준경]]에게 "그대가 구원병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오."라며 원병 요청을 지시하자 척준경이 허름안 옷을 입고 야밤에 줄을 타고 성벽 밖으로 나가 혈혈 단신으로 여진족 진영을 돌파하고 정주성까지 달려가 병력을 요청하는데 성공한다. 척준경과 구원군은 통태진(通泰鎭)과 야등포(也等浦)를 거친 후 길주에서 여진군을 크개 격파하며 웅주성의 포위를 풀어내는데 성공한다. 웅주성을 포위했던 여진은 어쩔수 없이 영주성을 공격했으나 이곳에서도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게 된다. 같은 해 4월 또다시 대군을 이끌고 웅주성에 도달한 여진은 웅주성 일대를 목책으로 둘러싸 겹겹이 포위하기에 이른다. 임언과 최홍정이 이끄는 웅주성의 고려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서서히 힘이 부치기 시작했고, 4월 23일에 웅주성이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오연총에게 1만의 병력을 주며 급히 지원을 보내게 된다. 여진은 이 소식에 오음지령(烏音志嶺)과 사오령(沙烏嶺)에 병력을 배치해 고려군을 막으려 했으나 고려군은 두차례 접전 끝에 482명의 적병을 참살하고 웅주성 일대를 둘러싼 [[알레시아 전투|여진의 목책 뒤에 진지를 구축]], 앞뒤로 공격당할 위기에 빠진 여진은 웅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게 된다. 같은 해 7월에는 행영병마판관어사(行營兵馬判官御史) 신현(申顯)이 고려 수군을 이끌고 영인진(寧仁鎭)[*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에서 적을 공격해 20명의 목을 베는 승전보를 보내온다. [[척준경]]의 엄청난 활약상에 완안부 여진은 전략을 바꾸어 전면전이 아닌, 소수 병력으로 지속적인 소모전을 펼치는 방식을 선택했고, 고려는 이에 맞서기 위해 [[척준경]]과 [[왕자지]]를 별동대 역을 맡겨 여진의 기습 공격을 방비토록 했다.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영주(英州)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권 7, 예종 3년 8월}}} ----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권 7, 예종 3년 9월}}} 문제는 이런 지속적인 공격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수 없으니 농민들의 신음은 깊어 갔고 자급자족이 되지 못하니 물자들도 머나먼 고려의 영토에서 끌고 와야 했다. 그러나 상인들 마저 도적이 들끓고 여진의 공격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듯 나설리 만무했고 결국 고려는 동북 9성의 유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나라에서 여러 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기근, 유행병까지 겹쳐 백성의 원망이 드디어 일어났다. (중략) 적이 (동북 9성을 잇는 도로마다) 매복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함이 잦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 7, 예종 4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